번   호 21 번 글 조회수 3106
작성자 홍어사랑 작성일 2003/05/14, 08:25:45
제   목 인간 김대중 학창시절

`권노갑을 묶어라!' 신구주류 갈등설이 요동치던 99년 11월말, 정치권에서는 온통 그런 분위기였다. 물론 명분은 `가신(家臣)이 설치면 대통령에게 누(累)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섬뜩한 내용의 문건이 신주류 핵심인사들에게 은밀히 전해졌다. `연말정국 대응전략'이라는 A-4용지 10매 분량의 보고서 내용은 살벌했다. “국민의 거부감을 자극하는 이른바 권노갑 고문계 가신들을 중용하면 또다른 실책을 범하게 됨. 국민이 폐쇄적인 권력 마피아로 간주하는 권고문계가 권력의 핵으로 부상하면 총선을 그르치게 됨. 한광옥, 남궁진, 최재승은 이미 언론들의 눈총을 받기 시작했음. 따라서 가신들을 쓸때는 충성스러우면서도 국민의 신망을 받는 유능한 가신을 써야함. 청와대와 당(黨)의 권력핵심 인사에서는 지역안배 및 신구안배 원칙을 버리고 美 백악관처럼 유능한 정권장출파 인물 우선을 인사원칙으로 확립해야 함” 그리고 며칠후인 12월초 주요 일간지에는 보고서 내용과 유사한 제목들이 쫙 깔렸다. `구태인물 중용, 동교동 일방통행 우려' `호남출신이 말썽, 이러다 총선 다 망친다' `신당 동교동계 중심으로 가나' 또다시 여론은 구주류에 불리하게 형성되고 있었다.
 이 무렵 신주류 수중에 있던 문건 하나가 유출되어 권노갑 고문의 손에 들어갔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김대통령의 손에도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권고문은 쓴웃음을 지었다. “할테면 해보라지!” 이때쯤 권고문은 옷로비사건을 계기로 오랜 칩거 생활을 끝내고 다시 힘을 얻은 때였다. 당시 권고문은 극비리에 김대통령을 만나고 있었던 것 같다. 국민의 정부 출범과 동시에 발이 꽁꽁 묶여있던 권고문이 부활한 것은 순전히 신주류의 자충수 때문이었다. 99년 5월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와대의 핵심 인사는 러시아와 몽고를 순방하고 돌아오던 김대통령의 특별기를 향해 급타전을 보냈다.
 요지인 즉, `옷로비사건이 여론을 크게 악화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김태정 검찰총장의 경질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웬만큼 중대한 사건이 아니고서는 대통령 특별기에 급타전을 보내는 경우가 드문데, 이 청와대 참모는 상황을 매우 위험스럽게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경질이 아니라 법무장관으로 영전이었다. 당시 청와대 참모들은 김대통령의 생각을 180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김중권 비서실장 밖에 없었다고 혐의(?)를 두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김중권-김태정-박주선으로 이어지는 신주류측이 타격을 받고 후퇴하는 대신 권노갑 고문을 중심으로 하는 구주류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이렇듯 천신만고 끝에 부활한 권고문이지만 그의 앞에는 `이용호 게이트'라는 또 다른 덫이 기다리고 있었다.
 권노갑이 누구인가. 세상이 다 아는 김대통령의 최측근이다. 정치역정은 물론 학연, 지연까지 끈끈하다. 김대통령이 목포 북교초등학교 30회, 권고문은 34회, 김대통령이 목포상업고등학교 22회, 권고문이 26회이며, 나이는 5살 차이가 난다. 권고문이 김대통령을 처음 본 것도 1945년 해방직후 목포상고 재학시절 학교운동장이었다.
 당시 목포상고 내에서 학생들간에 집단 패싸움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에 졸업생 선배 한명이 소방차를 몰고와 “일제 36년도 서러운데 동문들끼리 이게 무슨 꼴이냐” 며 감동적인 연설을 했는데, 그가 바로 김대통령이었다. 그때 권고문의 머릿속에는 목포상고의 똑똑한 선배 김대중이 깊이 각인되었다. 이후 15년이 흘러 19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가 다시 치러지자 권고문은 `재경목포상고 동창회'를 만들어 스스로 실무간사를 맡아 무작정 김대통령의 선거운동에 뛰어든다. 그것이 40여년 인연의 첫걸음이었다. 고향 선배에 초등학교, 고등학교 선배였으니 오죽했을까.
 김대통령은 익히 알려진대로 학창시절 성적이 뛰어났다. 목포 북교초등학교 4, 5, 6학년때 73명 가운데 1~2등을 하다가 수석으로 졸업했고, 1939년 목포상고 입학시 총 164명 가운데 수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졸업 무렵에는 일제의 징병 문제로 학업을 소홀히 해서 164명 중 39등으로 졸업했다. 정치인 김대중은 학창 시절을 통해 크게 세가지를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초등학교때부터 역사를 좋아해서 서양역사든 일본역사 등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래서인지 동교동 지하 서재나 일산자택 2층 서재, 정계은퇴 이후 머물렀던 영국 케임브리지 서재에는 유난히 역사서적이 많았다. 야당시절이나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역사성'이니 `역사적 평가'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초등학교 동창생에 의하면, 김대통령은 수학을 귀신같이 잘했다고 한다. 경제와 수리에 밝다는 얘기다. 김대통령은 또한 어릴적 안색이 창백하고 왜소했지만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내내 반장을 놓치지 않아 어릴 때부터 리더십이 있었다. 한마디로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그런데도 김대통령은 학창시절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데 대한 학력콤플렉스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김대통령이 재임중 특별히 고등학교 동문을 챙겼다는 얘기는 없었다. 덕분에 역대 대통령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향이나 동문들로부터 자유로웠다.
 오히려 더 냉정한 측면이 있었다. 98년초 국민의 정부가 막 출범할 무렵. 초대 총무수석 자리를 놓고 신주류의 박금옥씨와 구주류의 이수동씨가 맞붙었을 때도 김대통령은 두말 않고 박금옥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씨는 김대통령의 학창시절을 가까운 곳에서 보았던 몇 안되는 오랜 가신이다.
 권고문이 밖으로 드러난 `파워풀 집사'라면 이씨는 동교동 빈집을 지키거나 집안 살림살이를 도맡는 감추어진 `오리지날 집사'였다. 이씨는 이후에도 총무수석 자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청와대 관저를 1주일에 1번꼴로 드나들면서 목포앞바다에서 막 잡아온 생선이나 홍어, 과일 등을 이희호 여사에게 부지런히 전달했지만, 야속하게도 박금옥 비서관은 꼬박 5년을 채우고 나왔다. 결국 김대통령에게 학창시절은 많은 것을 배운 소중한 기간이지만 그렇다고 밖으로 내놓고 싶지도 않은 `내 마음의 풍금'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출처, 전남일보 2003년 0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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