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촌 선생이 하당 천교수 동네로 이사 오면서부터 그가 아침마다 솔이 푸른 입암산, 선응사 뒷산을 오르시는 모습을 천교수도 보곤 한다. 다촌이 산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이쪽이 신 도심, 이쪽은 구 도심, 저기가 목포 내항, 저기는 북항, 이쪽 신외항 쪽으로 배를 타고 다도해를 지나면 그의 고향 흑산이 보일 거라고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가 이 조그마한 도시에서 살아온 지 어언 30년, 아니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까지 합하면 36년이 된다. 대학공부와 군복무 때문에 약 8년 동안 서울, 부산, 전방을 거쳐 다녔다. 그러고 보니 약 44년 동안 타향살이를 한 셈이 된다. 섬마을에 중학교가 없었기에 중학교에 간다고 섬마을 고향을 떠나야 했던 14살 섬아이의 나이가 60 가까이 된 것을 그는 실감한다.

정상에서 월출산 넘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마음은 그를 자꾸 과거의 추억으로 동여매곤 한다. 갑자기 고향이 그리워지고, 그를 사랑으로 감싸주신 부모님, 고향집, 그가 놀던 옛 동산, 한여름이면 맑고 시원한 바닷물에 멱감고, 햇살에 뜨거워진 차돌 위에서 동무들과 알몸으로 뛰놀며 뒹굴었던 섬마을 뒷 짝지(주: 파도에 씻겨 달아진 마을 뒷의 차돌 해변) 깜둥이 어린 시절이 뇌리를 스치며 아물거렸다.

장구(장고) 같이 생긴 장구섬 흑산 다물도. 장고 가운데 좁은 부분이 바다 위에 떠 있듯이 평평한 곳에 자리잡은 다촌리 마을은 옛날에는 뒷 짝지 바닷물이 앞 짝지로 통해 있었다고 도깨비 이야기를 가끔 해주시던 그의 할아버지가 그에게 알려주셨다. 마을 앞뒤에는 바다요, 마을 좌우에는 높은 산이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들 중의 섬 다물도. 뒷 짝지에서는 홍도가 구름처럼 보이고 앞 짝지에서는 수리, 도목리, 오정리가 옹기종기 모인섬, 대둔도가 바로 앞에 머문다. 뒷 짝지는 마을에서 북서쪽에 위치하여 낮은 수심에 바다속 여(암초)들이 많고 겨울 파도를 막아주는 섬이 없어 북풍이 심하면 우글거리기 일쑤다. 앞 짝지는 마을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북풍에 안전하고 바로 앞에서 파도를 대둔도가 막아주어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고 있듯이 크고 작은 고깃배를 품고 있는 천혜의 흑산 일등 항이다.

바다가 울어 홍애(홍어)가 잡히던 겨울이면 뒷 짝지 뒷 바다는 북풍에 미친 듯이 모들리 상어의 하얀 줄무늬 이빨같은 모습으로 쓰악쓰악거리며 혀를 내밀어 뒷 짝지를 할퀴고 깽꺼리(주: 파도에 의한 바다 물거품) 를 장고섬 마을 앞으로 토해 낸다.

그의 동네 집들은 대부분 등 뒤에 산이 있지 않고 바다가 있기에, 뒷 짝지에서 넘어오는 깽꺼리를 등뒤로 맞아야 한다. 하지만 겨울 바람을 피해 먹돌담으로 돌러싸인 초등학생인 어린 다촌의 키에 알맞게, 움푹 들어간 듯 남향으로 지어진 고동처럼 생긴 초가집들은 뒷 짝지 파도 소리와는 대조적으로 따스하고 고요하며 평화롭다.

오늘도 파도가 뒷 짝지 자갈을 할퀴고 지나가며 쓰악쓰악거리는 소리에 새벽잠이 깨려는 듯 초등학생인 어린 다촌, 용일이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려 했다. 상어 기름에 뿌리내린 심지에서 수줍은 색시처럼 피어나는 작은 등잔불 옆에서 온 밤을 안 주무시고 홍어배 누비옷 바느질을 하시며 걱정하시던 그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아이고 내자석, 뒷 짝지 놀(파도) 소리가 몹시 시끄럽구나. 그런데 이 바람에 웃바닥(바다)에 올라간 우리 배가 내려왔는지 걱정이다." 그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어머니에게 안심하시라는 모습으로 말하며 나갔다.

"엄마, 장굴(앞 짝지)에 가서, 우리 배 왔는가 보고 올게요."

동틀 무렵 장굴에는 동네 어른들이 마당 앞 담울 밑에 옹기종기 웅크리고 삼삼오오 앉아서 앞 너둔(주: 물이 써서 선창에 배를 못대고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도 거기에서 동네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며 계시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 다물도에는 유일한 마을 다촌리 130채의 집들이 장구녀(주: 여름에 뒷 짝지 물 속에서 헤엄치며 놀았던 물 속의 장고같이 생긴 바위 이름) 한가운데 고동 떼처럼 모여 사는 흑산도에서도 해산물이 많이 나기로 제일 가는 부자 마을이다. 가을 사리 때 그의 아버지 그리고 형들이 해바리가서 잡아온 그가 손으로 들기에는 너무 큰 너벅통에 몇 통씩이나 가득히 잡아오던 전복, 해삼, 여름이면 동구, 서구, 남구, 북구, 똠으로 미역을 캐와 앞 뒤 짝지에 산더미처럼 퍼놓고 풍선 돛대를 삼각으로 묶어 세워 큰 저울을 매달아 집집이 나누어 바지게, 너벅통 등으로 이고 지고 가던 모습, 톳을 뜯어와 밭에 거름으로 하고, 바위에 푸짐하게 자란 파래, 김, 배말, 꿀퉁, 홍합 등을 따려고 우리 북구 똠 우리 뗏마(주: 약 15명 정도 실을 수 있는 노가 3개 백이 2개 딸린 가라지 낚시로 쓰는 배)에 타고가던 날, 뗏마 배마다 큰 바구니 든 사람들을 가득 싣고 동네 아낙네들 뱃노래 부르며 잔잔한 앞 짝지 동네 너둔에서 같이 출발하여 있는 노, 있는 백 다 저으며 심섬, 대섬, 몸섬으로 가던 수많은 배들의 장관을 그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동네에 머구리배 발동선이 수십척이 오면 여름 새벽마다 산더미처럼 쌓여진 지조개(비단가리비)를 까던 동네 사람들, 해산물을 흑산에서 제일 많이 싣는 곳이 바로 다물도요 목포에서 사온 물건을 제일 많이 내리는 곳도 역시 다물도라는 것은 당시에는 목포-흑산간 여객선 사람들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동네 다물도는 분명 어린 그가 보기에도 일없이 놀고 있는 사람일랑 없는 부자 마을임에 틀림없었다.

가라지, 고등어, 가자미, 상어, 모들이(큰 상어), 외낙(점있는 큰 상어), 홍어 등에 이르기까지 앞 짝지 장굴에다 푸는 것이 굿이었다. 그 중에서도 철따라 그 많은 고기들을 제일 많이 그의 집 작은 배며, 큰 다불리 발동선이 가득 싣고와 장굴(주: 장구섬 다물도 앞 짝지는 해변 집들 바로 앞에 연중 제일 많이 물이 들 때면 찰랑찰랑 돌담이 있고, 보통 때 물이 빠지면 그 밑으로는 깨끗한 모래 자갈밭이 완만하게 깔려 있어 어린이들이 놀기가 좋다. 그 밑으로는 단단한 뻘이 깔려있고 뻘 위에는 진질이 무성히 자라서 어린이들이 많이 캐먹고 다녔다. 그 뻘 속에는 반지락이며 낙지도 많이 살고 있다. 사리때 물이 많이 쓰면 뻘등이 보이고 더 깊은 곳은 항상 물에 잠긴 채 물 속에서 진질 등에 우무가사리가 많이 자라고 그 속에 우럭, 숭어, 모치 등이 노닐고 있었다. 여기서 장굴이란 집들 앞 모래 자갈밭을 의미한다. 물이 들면 모래 자갈밭까지 올 때가 많다.)이나 장굴에 매어진 다른 운반선에 푸던 광경을 어린 그는 자주 보았다. 그의 집이 그의 동네에서 제일 부자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자란 그의 어린 시절, 마냥 즐겁기만 했던 행복한 부잣집 막내아들의 어린 시절을 그는 수십 년이 지나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자기집 배가 그의 동네에서 제일 많이 고기를 잡아오면 신이 났다. 파도가 높아 배가 바다에서 견디기가 어려우면 다물도로 내려와야 한다. 배들은 고기를 많이 잡으면 다물도 항에 들어오기 전부터 기적을 계속하여 울리며 너둔(다물도항)에 도착한다. 동네 사람들이 그 기적소리에 동네 앞 장굴로 모인다. 다물도에서 제일 큰 발동선 대어호(주: 다물도에서 제일 큰 발동선으로 우리배 이름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1950년대 흑산 홍어를 가장 많이 잡은 배로서 시속 8마일 나가는 배로 흑산 다물도에서 북북동 쪽으로 8시간의 위치인 웃바닥이라는 곳이 그 어장이라고 기억되고 있다. 당시 어른들의 말에 의하며 다물도에서 목포까지보다 더 멀다고 했다. 당시에 홍어를 많이 잡으려면 웃바닥 웃녀 혹은 아랫녀가 있는 지점을 잘 찾아내야 한다고 했다. 이 지점은 망망대해에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눈으로는 찾을 수 없다. 대어호가 홍어를 다른 배보다 많이 잡는 이유는 첫째, 홍어가 있는 그 장소를 잘 찾기 위하여 대어호에는 동서남북을 잘 알려주는 지남철 역할을 하는 당신 어른들이 말하는 컴퍼스가 있었다. 선장은 배의 속력과 바다물의 흐름과 바람의 속도 및 파도의 고저 수심 측정 등으로 그 바다 속 홍어가 많이 있는 지점을 찾았다고 했다. 물론 요즈음에는 대어호보다 더 작은 배도 로랑, 어군 탐지기 등을 싣고 컴퓨터로 정확하게 그 장소를 찾아내고 있으며 고기 있고 없는 것도 찾아낸다고 한다. 대어호가 홍어를 다른 배들보다 더 많이 잡는 둘째 이유는 대어호에는 주낫이 다른 배들보다 더 많다. 보통 홍도 무지(흑산에서 한시간 내지 두사간 거리)에서 잡는 소형 홍어 배들은 주낙을 20~40바쿠 정도 싣고 다니지만 대어호는 150~200 바쿠를 싣고 다닌다. 지금 내가 기억하기로는 주낫 한 바쿠에 3~4미터 간격으로 약 40개의 애리가 달린다. 여건이 되는 한 많은 주낫을 바다 속에 넣어 놓고 한 쪽에서는 손으로 당겨 올리고 한 편에서는 홍어가 물도록 한다. 이깝(미끼)은 살린 볼락을 칼로 썰어 사용할 때도 있고 정어리, 오징어, 낙지 등을 당시에는 쓰고 있었다. 물론 최근에는 미끼 없이 걸락으로 하다가 흑산 홍어가 귀해진지 오래지만. 대어호가 홍어를 잘 잡는 셋째 이유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서 파도를 무서워하지 않는 대어호의 선주 및 선장과 선원들의 용맹심이었다. 선원 중에서도 지위가 낮은 하장까지도 파도를 타는 용맹심에 있어서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나이가 대어호에서 제일 어린 하장 형에게서 그 용맹스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의 집 배(그 배를 어린 그는 우리 배라고 불렀다.)가 홍어를 만선으로 싣고 귀항한 후,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오색기를 풍기고 선원 아저씨들이 선상에서 꽹과리를 치며 동네 앞 너둔을 돌고 있을 때 그는 제일 신이 났다.
마침 산 너머에서 전에 자주 들었던 기적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기적 소리를 드고 용맹스런 대어호 선체를 상상하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계시는 곳으로 가서 아침 인사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웃고 계셨다. 동네 어른들은 지금 들리고 있는 기적 소리가 뉘집 배의 기적 소리인가를 짐작하고 있었다.

"기적 소리를 들어보니까 대어호 같구먼. 아, 참말로 밤에 바람이 세게 불었었는디 고생들 깨나 했겠구먼."

동이 트고 너둔에 떠 있는 배들이 뉘집 배인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밝아졌다. 그가 너둔을 살펴 본 바로는 대어호만 보이지 않았다. 뻘등이 보이도록 물이 써, 선착장에 배들을 댈 수 없으므로 밤 사이에 바다에서 온 배들이 너둔에 닻을 내리고 정박하고 있었다. 기적소리는 들리지만 아직 배가 너둔에 들어오지 않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으로는 기적 소리의 음색으로 보거나 너둔에 대어호만 안 보이는 점으로 봐서 틀림없이 대어호일 것으로 생각했다.

바람이 불어 배들이 바다에서 쫓겨올 때면 언제나 대어호는 맨 나중에 들어왔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그의 어머니는 언제나 걱정이 태산이었다. 등잔불 옆에서 온 밤을 천지신명에게 기도하시며 바느질하시는 그의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그는 지금도 눈물을 흘린다. 그가 어떻게 당시의 어머니 속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랴마는 파도 속에서 대어호와 더불어 큰아들이 무사히 제발 돌아오기만을 천지신명께 빌면서 온밤을 뜬눈으로 보내셨을 그의 어머니의 숭고한 마음을 지금에 와서 짐작해 보는 것이다. 성장한 다촌은 그의 여동생이 왜 여섯 살이나 아래가 된 것을 알고 있었다. 즉 그의 큰형이 일제 시대에 일본 나가사끼로 징용간 후, 그의 어머니는 그의 큰형이 올 때까지 그의 큰형수와 같은 방을 쓰시며 천지신명께 비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한참 있다가, 드디어 방금 목욕하고 나온 오리같이 물에 젖은 대어호의 몸체가 나타났다. 예전처럼 오색기를 브리지에 꽂고 기적을 울리며 너둔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아버지의 눈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뻘등에 걸려있는 그의 집 뗏마를 미리 뻘등에서 미려내어 빨리 바다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와 물에 젖은 옷을 갈아 입히고 추위를 녹여야 한다고 하셨다.

오색기가 펄럭이는 대어호 선상에서 선원들은 물에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채 꽹과리와 징과 장구를 치는 동안 대어호는 너둔을 두번 돌고 닻을 내렸다. 8명의 선원들은 셋째형이 타고간 뗏마 종선으로 내려와 앞장굴에서 뒷 짝지쪽으로 세 번째 집인 그의 집을 향해 개선장군들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웃는 얼굴로 말을 주고받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언제 나온 지도 모르게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와 그의 집 마당에 수십명 사람들이 가득해졌다. 다촌리 마을(주: 다물도 마을을 당시에는 법적으로 다촌리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초가집 중에서 뚜렷하게 돋보이는 기역자 낮은 기와집, 그의 집의 큰방, 큰방 앞의 마루, 작은방, 사랑방 등에는 사람으로 꽉 차 있었고 마당에 있는 두 개의 평상에도 가득히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 외에도 마당에 서있는 사람들과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장독대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 술을 거르고 있는 아주머니, 상을 이리저리로 나르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온 집안 분위기는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갑자기 큰방과 큰방 앞마루에서 음식을 드시면서 이야기하시던 분들이 조용해졌다. 선장이며 선주인,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도 용감한 똑바로 선 30 나이의 우리 큰형이 일어서서 동네 어르신들 앞에서 정식 웃바닥 홍어잡이(흑산 홍어의 원조) 상황보고를 하고 있었다.

"저희들은 3일 전에 웃바닥으로 출항했었습니다. 그전에 주낫을 바다에 빠쳐 놓고 바람이 너무 심하여 못 당그고 내려왔기 때문에 우선 그 주낫을 당그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전에 바다에 빠쳐 놓았던 주낫에서 코코마다(주:주낫에 달린 줄에 달려있는 낚시마다)에 홍어가 물고 있었습니다."